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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운동가 글씨체 – 독립서체 윤동주 서시체

by 존버씨 2024. 1. 18.

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서체 윤동주 서시체

이 폰트는 2019GS칼텍스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한 폰트입니다폰트를 사용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했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아름다운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사랑받는 특별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윤동주 시인을 두고 중국 포털 바이두에서는 '중국인'이라 하고, 일본 위키에서는 또 일본인이라 표기 되어 있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우리말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평생을 한글로 시를 쓰셨는데 말이죠.

 

저작권없는 상업용 폰트 - 독립서체 윤동주(서시체)
저작권없는 상업용 폰트 - 독립서체 윤동주(서시체)

 

독립서체 윤동주(서시체)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시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서시'를 윤동주 서시체로 적어 봤습니다.

 

 

독립운동가 분들의 정신과 마음이 담긴 글씨체를 다운로드하여 직접 사용해 보세요.

윈도우용(TTF) 다운로드.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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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곳 - 중국 지린성 룽징시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곳 - 중국 지린성 룽징시

윤동주는 북간도(옌볜 조선족 자치주) 중국 지린성 룽징시(명돈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입니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32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지역에 설립된 은진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의해 학교가 문을 닫자 다시 용정지역에 있는 광명학원(현 용정중학교)4학년으로 편입해 졸업하게 됩니다. 이때 윤동주의 성적은 평범했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어 실력은 제일 잘 받은 점수가62점이었고, 40점을 받은적도 있다고 하네요.

193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1939년 연희 전문대학교 2학년 재직 중 조선일보에 산문<달을쏘다>, 소년지에 시<산울림>을 발표하였습니다.

1940년 3학년 때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다섯 살 터울의 2년 후배인 정병욱 (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나와 북아현동(서울시 서대문구)과 누상동(서울시 종로구)등지에서 하숙 생활을 함께 했는데 누상동에서는 소설가 김송 선생님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정병욱은 나중에 윤동주 유고 시집을 보관하였다가 세상에 알린 인물이죠.

19411120<하늘과 바람과 별과 >라고 스스로 제목을 붙인 시 19편이 들어간 친필 시집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일제의 검열을 우려하여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윤동주는 시집 원고 세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나머지 두 부는 스승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습니다.

이시기 태평양전쟁으로 전시 학사일정에 따라  3개월 빠른 194112월 연희전문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대학교 졸업후에도 윤동주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바로 학부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내지 유학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19402월부터 19458월 광복 직전까지 일제가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를 쓰도록 강요함)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때 창씨개명한 윤동주의 일본 이름은 히라누마 도쥬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착잡한 심정을 여러 편의 시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중 유명한 시가 <참회록>이죠.

1942년 봄쯤 일본으로 건너가 고종사촌관계인 단짝 송몽규와 함께 교토 제국대학(현 교토 대학)문학부의 선과생 선발시험에 응시했으나 송몽규만 합격하며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 유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해 3월 일본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도쿄 릿교 대학(현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에 단짝 송몽규가 있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입학을 하여 윤동주는 송몽규와 다시 재회하게 됩니다. 도시샤 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이기도 합니다.

1943714일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단짝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채포 됩니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며 사상범으로 체보된것입니다..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됩니다.

1944년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함께 나와 하숙 생활을 함께 했던 정병욱마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면서 윤동주에게 받은 시집 원고를 그는 어머니게게 맡겼고, 어머니는 이를 광양(전라남도 광양)집의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고합니다.

19452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동주 그의 나이 27세 때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둡니다. 윤동주와 함께 수감되었던 송몽규도 윤동주가 떠난지 23일 뒤인 310일 죽었다고 합니다. 생전의 송몽규는 면회 온 친척에게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윤동주가 생체 실험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하네요.

19458월 해방이 되자 집으로 돌아온 정병욱은 윤동주에게 건네 받은 시19편과 다른 유고를 더 모아 총 31편으로 19481월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를 펴냈습니다.

 

다른 두 부의 시집 원고는 어떻게 됐냐고요? 윤동주와 스승 이양하교수의 원고는 유실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병욱의 원고가 남아있어 해방후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윤동주가 만주 벌판에서 총칼을 들고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 이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윤동주는 일본이 한국어(조선어)를 금지 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가 아주 심했던 시기 조선어로 조선의 정서를 담은 시를 쓰다 처벌되었습니다. 윤동주의 무기는 바로 였죠. 윤동주 시인이야 말로 독립운동가로 읽힘이 마땅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