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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운동가 글씨체 - 독립서체 백범 김구체

by 존버씨 2024. 1. 22.

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서체 백범 김구체

이 폰트는 2019년 GS칼텍스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한 포트입니다. 폰트를 사용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했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아름다운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저작권없는 상업용 폰트 - 독립서체 백범김구체
저작권없는 상업용 폰트 - 독립서체 백범김구체

 

독립서체 백범 김구체

백범 김구 명언 -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백범 김구 명언 -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백범 김구선생님의 명언 중 하나를 백범 김구체로 한번 적어봤습니다. 

 

 

독리운동가분들의 정신과 마음이 담긴 글씨체를 다운로드하며 직접 사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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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 받으러 왔다가 이게 뭔 말인가 싶으시겠지만 독립운동가체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일대기를 함께 포스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백범 김구선생님은 고종 13년부터 대한민국의 탄생까지 엄청난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셨던 분이라 자료가 엄청나게 방대하고 오류들도 많습니다. 포스팅이 너무 길어 지루 할 수 있겠지만 역사를 돌아본다는 마음으로 '궁금한 존버씨'가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해 봤습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년 8월 29일 ~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태어난 곳 -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백범 김구 선생이 태어난 곳 -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현 황해남도 태안군 지촌리)

 

백범 김구의 유소년기

1876년 (고종13년) 강화도조약[각주:1]이 체결 된때 조선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외동아들 '김창암'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모친이 천연두를 부스럼인 줄 알고 고름을 짜 얼굴에 흉터가 생겼고 거의 죽을뻔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1884년 9세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때 조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백범 김구의 청년기

1890년 15세 학골 정문제의 서당에서 <당시> <대학> 등을 배우는 한편 과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합니다.

1892년 17세 조선왕조 마지막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매관매직[각주:2]을 일삼는 당시 상황에서 보기 좋게 낙방합니다. 창암이 과거에 떨어져 상심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관상 공부나 해보라"하여 <마의상서>[각주:3]를 빌려다가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자신의 얼굴을 보니 모든 흉상이 다 들어 있더랍니다. 창암은 이런 최악의 관상에 상심했지만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 즉,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 씀씀이 보다 못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1893년 18세 동학[각주:4]에 입교하면서 '김창암'에서 '김창수로' 이름을 바꾸고 창수는 '아기접주[각주:5]'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백범 김구의 성년기

1895년 20세 을미사변[각주:6]이 발생하였고 이때 창수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1896년 21세 치하포[각주:7]사건으로 해주에서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심문을 받다가 곧바로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며 결국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다행히도 고종이 이일을 알고 창수의 사형집행을 보류하도록 하여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그 후 1년 8개월이 넘는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1898년 23세 3월 창수는 탈옥하여  승려로 위장해 마곡사[각주:8]에 은거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원종'스님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하죠. 하지만 이듬해 속세로 다시 돌아옵니다.

1900년 25세 김천 월곡 성태영의 집에서 은거하며 '김창수'에서 거북구 자를 쓴 '김구(金龜)'로 이름을 바꿉니다.

1901년 26세 김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는데 위독한 아버지를 보며 슬퍼하던 중 가난한 형편에 어찌할 수 없어  왼쪽 허벅지를 조금 베어 구워드리고 흐르는 피를  마시게 해 드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902년 27세 김구는 여옥과 약혼을 하지만 이듬해 정월 혼례를 코앞에 두고 병들어 사망합니다.

1903년 28세 아버지의 3년상을 끝내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도산안창호의 누이 안신호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04년 29세 12월 29일 신천 토박이인 최준례(16세)를 만나 결혼합니다. 

1905년 30세 을사조약[각주:9]이 체결되자 김구는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06년 31세 아내 최준례가 첫째 딸을 낳았지만 이듬해 사망합니다. 김구가 황해도 신천에서 안악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엄동설한에 너무 어린 아기를 가마에 태워간 것이 화근이 되어 찬바람을 맞은 아기는 얼마못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1907년 32세 신민회[각주:10]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합니다.

1909년 34세 안중근의거[각주:11]와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도 석방됩니다.

1910년 35세 경술국치[각주:12]로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날이 있던 한탄스러운 해이기도 하지만 둘째 딸 화경이 태어난 기쁜 해이기도 했습니다. 

1911년 36세 일본이 안명근사건[각주:13]을 '데라우치 마사케'총독 암살모의로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대거 체포합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과 거짓자백을 강요받았죠. 그중 김구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허위날조라고 반박하기도 했으나 15년 형에서 2년 형을 추가받고 총 17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그해 9월 항소심까지 기각되며 서대문 감옥에 수감됩니다. 

1912년 37세 김구는 '열 사람이 있으면 사진은 아홉 번째 해당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에서 자신의 이름 거북구(龜) 자의 구를 아홉 구(九) 자로 바꾸고 호를 백범이라 정합니다. '백'은 천한 날들 살아온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 '범'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범부(凡夫)라는 뜻에서 정했다고 하네요.

백범 김구의 중년기

1915년 40세 걸음마를 배우고 옹알이를 시작한 둘째 딸 화경은 김구의 출옥 석 달 전 죽게 됩니다. 이듬해 셋째 딸 은경이 태어나지만 역시나 다음 해 너무 일찍 잃고 말죠. 그 후 김구는 특사로 가출옥하여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 동산평 농장의 놈감생활을 하며 농촌계몽운동[각주:14]과 소작쟁의[각주:15]등을 주도하였습니다.

1918년 43세 신한청년당[각주:16]참여합니다. 같은 해 첫째 아들 인이 태어나죠.

1919년 44세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독립선언서[각주:17]발표를 시작으로 한국은 4월 11일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는 문구로 대한민국 임시 시헌장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상하이(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각주:18] 을 정식으로 선포하게 되죠. 3월 29일 황해도 안악을 출발했던 김구도 4월 13일 상하이 도착하여 내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가 8월 12일 임시정부 경무 국장이 됩니다. 김구는 우리나라 초대 경무국장이면서 대한민국 1호 민주경찰이었죠. 경무 국장이 된 김구는 주로 일본 밀정을 처단하고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9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삼권분립[각주:19]에 기초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됩니다.

1920년 45세 아내 최준례가 첫째 아들 인을 데리고 김구가 거주하던 상하이로 건너오게 됩니다. 한편 임시정부의 연통제[각주:20]와 교통국[각주:21]등이 일본에 발각되기 시작했고 독립 군대의 봉오통전투[각주:22]와 청산리전투[각주:23]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미친 듯 추적해 왔죠. 이를 피해 러시아 국경지역으로 이동했던 독립부대들은 자유시참변[각주:24]을 겪게 되고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놓고 여러 세력파들이 갈등을 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1922년 47세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각주:25]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건너왔습니다. 9월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고 둘째 아들 신도 태어납니다. 이런 상황들은 독립운동가의 어린 아내 최준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하니 굶기 일쑤였고 그러다 보니 아내 최준례의 젓이 모질라 시어머니의 공갈 젓을 물리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죠.

1923년 48세 1월 임시정부의 혼란이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가 소집되었지만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옹호파 vs 현재 임시정부에서 구조만 새롭게 바꾸자는 개조파 vs 해체 후 새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들의 갈등은 해결은 해결되지 못했고 6월 6일 내무부 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는 '내무부령 제1호'를 발표하면서 각지의 대표들과 독립군세력들이 이탈하게 되고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해집니다.

1924년 49세 1월 1년의 투병생활 끝에 아내 최준례가 사망하지만 일본의 감시가 심했던 김구는 부인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1925년 50세 임시정부 1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되고 박은식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취임되지만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 지도체제를 국무령제로 개편하면서 다음 해 김구는 국무령에 선출됩니다.

1927년 52세 3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각주:26]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합니다. 

1928년 53세 김구는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여 다음해 '백범일지' 상권이 완성됩니다. 

1930년 55세 김구가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선 되자 1월 25일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각주:27]을 창당합니다.

1931년 56세 만보산 사건[각주:28]과 만주사변[각주:29]으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한인과 중국인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했고 10월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각주:30]을 창단하고 이봉창, 윤봉길 등 독립투사들을 양성해 이들을 중심으로 일왕 처단, 조선 총독 처단, 관동군 사령관 처단 등을 지휘합니다.

1932년 57세 이봉창의 도쿄 일왕 투탄 의거, 윤봉길[각주:31] 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로 중국인과의 갈등을 잠재우고 중국(중화민국)의 주석 장제스(장개석)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 한일을 한 명의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탄할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의지와 더불어 임시정부를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됩니다. 그 후 장제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윤봉길 의거 후 5월 8일 김구는 "한인애국단은 내손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단원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김구에게 60만 원(현재 가치 약 200억)의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강한 압박 속에서 임시정부는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고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항주), 자싱(가흥), 하이옌(해염현), 전장(진강), 난징(남경)등으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33년 58세 장쑤성(강소성), 자싱으로 피신한 후 5월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허난성(하남성) 뤄양(낙약)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니다.

1934년 59세 2월 김구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뤄양군관학교 입교생을 중심으로 한인특무대독립군[각주:32]을 조직하지만 다음 해 4월 일본에 발각되어 폐교됩니다.

백범 김구의 노년기

1935년 60세 김구는 이동영,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각주:33]을 창당하여 이사장을 맡습니다.

1937년 62세 7월 중일전쟁[각주:34]으로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후난성(호남성) 창사(장사), 광저우(광주), 류저우(유주), 치장(기강), 충칭(중경)으로 떠돌이 생활며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각주:35]를 결성합니다. 

1938년 63세 김구는 독립운동단체인 조선혁당 소속 밀정이던 이훈남이 쏜 총에 맞게 되는데 총알이 심장 바로 앞에 멈추어 겨우 살아나지만 몸에 박힌 탄환은 평생 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9년 64세 4월 29일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82세) 여사가 사망합니다.

1940년 65세 임시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충칭에 정착하게 됩니다. 9월 한국광복군[각주:36] 을 창설하고 10월 국무위원제를 지도체제인 주석제로 개편하면서 김구가 주석으로 선출됩니다.

1941년 66세 임시정부는 건국강령[각주:37]을 제정하고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각주:38]를 합니다. 이것은 한국이 연합국[각주:39]의 일원으로 승리해 승전국으로의 독립을 위한 큰 그림이었죠.

1942년 67세 조선의용대[각주:40]가 광복군에 편입되고 10월 민족혁당등 좌파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좌우합장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1943년 68세 3월 임시정부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영국 외무장관 '이든'과 전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을 국제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7월 김구는 카이로회담[각주:41]에 참석하게 될 장제스에게 한국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8월 한국광복군은 영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인도와 버바(현 미얀마) 전선에 대원을 파견합니다.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앞의 3 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결정이 나면서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게 됩니다.

1944년 69세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 되고 중국으로부터 광복군 통수권[각주:42]을 이양받아 한국 통수부 의장에도 취임하여 광복군과 미군 OSS(미국전략사무국) 간의 합동으로 군활동을 계획합니다.

1945년 70세 3월 29일 김구의 첫째 아들 인이 27세 폐병으로 사망합니다.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타격을 크게 받은 일본은 8월 14일 연합국에 항복을 통보하고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으로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게 됩니다.  광복 후, 2차 세계대전[각주:43]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를 패전국과 같은 분할점령지역으로 설정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다는 이유로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련(현 러시아)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했습니다.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중국에 있던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임에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고 요구받습니다. 그 바람에 석 달이 더 지난 뒤인 11월 23일에야 귀국할 수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김구의 입지는 너무 좁았습니다. 김구는 남북으로 나누어진 조국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여러 정치세력과 의논을 합니다. 모든 게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각주:44]가 열렸고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최장 5년간 4개국(미, 소, 영, 중) 신탁통치[각주:45]를 한다고 결의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한국인들은 물론 김구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12월 8일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담이 열리고 다음날인 29일 민족 스스로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탕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46년 71세 1946년부터 1947년 사이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 간의 입장차이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반도의 문제는 유엔[각주:46]으로 넘어갔고 유엔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하도록 하였으나 소련이 유엔의 남북한 총선거 결정을 거부함으로써  유엔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하도록 했습니다.

1948년 73세 4월 19일 남한 단독선거 결정을 받아들일 없었던 김구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 김일성을 만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을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시행되었지만 이를 반대하던 김구는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고 이렇게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정부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1949년 74세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경교장[각주:47]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효창원(현 효창공원)에 안장됩니다.

  1. 강화도조약: 1876년(조선 고종 13년) 조선과 일본사이에 체결한조약. 군사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은 부산외에 인천, 원산의 두 항구를 개항하게됨. [본문으로]
  2. 매관매직: 관직을 돈이나 재물을 받고 파는것. [본문으로]
  3. 마의상서(麻衣相書): 중국 당나라때 마의선인이 지은 관상에 관한 책. [본문으로]
  4. 동학: 조선후기 최재우가 서양사상에 반대하고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으로 창시한 민족 종교. [본문으로]
  5. 접주: 관내 동학도를 통솔하는 역할. [본문으로]
  6.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살해사건. [본문으로]
  7. 치하포사건: 1896년 3월 9일 아침 7시경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어난 사건. 한 주막에서 조선에 약재를 판매하던 일본상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한후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포고문을 붙였다는 일화가 있음. [본문으로]
  8. 마곡사: 현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본문으로]
  9. 을사조약: 을사늑약이라고도 하며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본문으로]
  10. 신민회: 1907년 4월 조국 독립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로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 [본문으로]
  11. 안중근 의거 관련 자료 보기

     

    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운동가 글씨체 – 독립서체 안중근체

    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서체 안중근체. 이 폰트는 2019년 GS칼텍스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한 폰트입니다. 폰트를 사용하기 전에

    johnburrssi.tistory.com

    [본문으로]

  12.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또는 한일합병조약이라고도 하며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본문으로]
  13. 안명근사건: 1910년 11월 안명근(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이 서관도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신천지역의 부호(돈많고 세력이 있는사람)을 찾아가 자금을 모집하던중 자금을 내주지 않던 민병찬과 그의 조부 민병설에게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위협하며 질책하였고 민병찬,민영설은 안명근이 사라지자 바로 재령헌병대에 밀고해 안명근은 1910년 12월 평양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힘. 이사건으로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 된사건. '105인사건 또는 '안악사건'이라고도 함. [본문으로]
  14. 농촌계몽운동: 농민을 대상으로 한것으로 농사일을 끝낸 저녁에 강연회와 토론회, 독서회, 야학등의 형태로 진행됨. [본문으로]
  15. 소작쟁의: 소작인들이 소작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벌이는 농민운동. [본문으로]
  16. 신한청년당: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청년 독립운동 단체. [본문으로]
  17.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선포한 선언서. 1919년 기미년에 발표했다하여 '기미독립선언서'라고도 함. [본문으로]
  18.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수립일은 4월 13일. 그러나 그당시 임시정부에서 4월 11일 정부 수립을 공포하고 수립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자료를 토대로 30만에 2018일 4월 13일 공식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바로 잡음. [본문으로]
  19. 삼권분립: 입법, 사법, 행정 세가지 기관을 나눠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일. [본문으로]
  20. 연통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외 업무를 위한 지하 비밀 행정 조직. [본문으로]
  21. 교통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통신연락 기구. 연통제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수합 임무를 맡음. [본문으로]
  22. 봉오동전투: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 12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한 전투. [본문으로]
  23. 청산리전투: 김좌진장군과 홍법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중국 지린성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여 승리한 전투. [본문으로]
  24. 자유시참변: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두만강 북쪽 지역의 일대를 북간도또는 동간도라 부름)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독립군 부태를 공격하고 수천여 명의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간도참변(경신참변). [본문으로]
  25. 조선총독부: 1910년~1945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 [본문으로]
  26. 집단지도체제: 하나의 조직 구조 안에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체제. [본문으로]
  27. 한국독립당: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대한독립을 위하여 일본에 대항한 단체. [본문으로]
  28.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2일 중국 만주 지린성(길림성) 장춘시(장춘현) 관성구 싼싱바오에 있는 만보산지역에서 농수로 문제로 한인농민과 중국농민 사이에서 일어났던 충돌 사건. [본문으로]
  29. 민주사변: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류타오후'사건(일본 관봉군이 만주 봉천에 있는 남만주 철도를 몰래 폭파시키고 중국군이 한일이라고 몰아 붙임)을 조작해 일본 광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공을 위한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 하기위해 벌인 전투. [본문으로]
  30. 한인애국단: 임시정부 산하의 항일무장투쟁 특수 비밀결사단체. [본문으로]
  31. 윤봉길 의거 관련 자료 보기

     

    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운동가 글씨체 – 독립서체 윤봉길체

    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서체 윤봉길체. 이 폰트는 2019년 GS칼텍스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한 폰트입니다. 폰트를 사용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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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으로]

  32. 한인특무대독립군: 1934년 한국국민당 산하 김구의 항일특무조직. [본문으로]
  33. 한국국민당: 김구등이 중국 항저우에서 창당한 정당. 1935년 11월~1940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한 정당. [본문으로]
  34. 중일전쟁: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 [본문으로]
  35.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1937년 8월 중국 난징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 김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체로 하여 중국 내의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3개의 단체와 그밖에 미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단합회, 대한인동지회,한인애국단등 6개의 단체 총 9개 단체에의해 결성. [본문으로]
  36. 한국광복군: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 약칭하여 광복군이라고도 함. [본문으로]
  37. 건국강령: 임시정부가 광복 후 건설할 민족 국가상을 제시한 것으로 개인이나 특정계급에 의한 독재를 철저히 배격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정치,경제,교육적으로 국민전체가 균등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를 실현한다는 것. [본문으로]
  38. 대일선전포고: 전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는 뜻을 밝힘. [본문으로]
  39. 연합국: 같은 목적을 이루기위해 한데 뭉쳐 서로 돕는 나라. [본문으로]
  40. 조선의용대: 1938년 중국의 한커우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본문으로]
  41. 카이로회담: 1943년 11월 22일~11월 26일까지 있었던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 세 연합국이 모여 열린 회담. [본문으로]
  42. 통수권: 모든 병력에 대한 최고 지휘권. [본문으로]
  43.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 1945년 9월 2일까지 일어났던 세계대전. [본문으로]
  44. 모스크바삼상회의: 1945년 12월 16일~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회의. [본문으로]
  45. 신탁통치: 자치능력이 없는 해방지역이 서구식 정치(민주주의), 경제(자본주의)시스템을 습득하고, 스스로 자치능력을 갖게 될 때까지 미국과 해당지역에 연고가 있는 국가들이 함께 대리통치하는 것. [본문으로]
  46. 유엔: 국제 협력을 증진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기구. [본문으로]
  47. 경교장: 현재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사용했던 개인사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