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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없는 상업용 폰트 독립운동가 글씨체 - 독립서체 한용운체

by 존버씨 2024. 1. 26.

저작권 없는 사업용 폰트 독립서체 한용운체

이 폰트는 2019 GS칼텍스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한 폰트입니다. 폰트를 사용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했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아름다운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승려이자 시인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입니다.

 

 

저작권없는 상업용 폰트 - 독립서체 한용운체
저작권없는 상업용 폰트 - 독립서체 한용운체

 

독립서체 한용운체

한용운-독립선언서'공약3장'
한용운-독립선언서'공약3장'

<님의 침묵>을 비롯해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저서한 책이 많지만 독립선언서에 추가로 담은 '공약 3장'을 한용운체로 적어봤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과 마음이 담긴 글씨체를 다운로드하며 직접 사용해 보세요.

윈도우용(TTF) 다운로드.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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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용(OTF) 다운로드.zip
2.73MB

 

 

 

오늘날의 우리가 역사적인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록된 책이나 전해저온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유독 연도가 정확하지 않더라고요. 이 점 참고해 주세요.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
만해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한용운선생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1879년  한용운은 몰락한 양반의 늦둥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유천'이고 본명은 '정옥'입니다.

1884년 어릴 적부터 집중력이 뛰어났고 천자문과 소학을 며칠 만에 줄줄 외울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1884년 6세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1887년 9세 <논어> <맹자> <시경> <서경>부터 <기삼백주> <서상기> 같은 어려운 책들도 거뜬히 통달했습니다. 한용운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 했지만 아버지 한응준은 아들 한용운에게 한 번도 칭찬해주지 않았고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했던 위인들처럼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옛 위인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오히려 더 채찍 했다고 합니다. 

1892년 당시에는 조혼풍습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였던 14세 때  진정숙(당시 16세)과 결혼을 합니다.

1894년 한용운이 가담한 동학농민운동을미의병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용운이 살고 있던 홍성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중에는 아버지 한응준과 형도 있었죠.

동학농민운동: 1894년 전라도 고부의 정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운동.

을미의병: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까지 내려지자 이에 반발해 지방 유생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1897년 19세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납니다. 한용운의 목적지는 서울이었지만 길을 아는 것도 아니고 해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서울로 가던 길목에서 설악산 백담사에 법력 높은 도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발길을 옮겨 백담사로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사는 만나지 못하고 백담사 오세암에 머물며 불교에 귀의합니다. 

1903년 한용운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기 위에 불교경전은 물론 다양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 <영환지략>을 읽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주저 없이 떠납니다. 걸어서 서울에서 원산까지 간 뒤 원산에서 해삼위(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배를 타고 이동하고 시베리아를 거처 모스크바와 프랑스, 미국까지 간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해삼위까지 갔던 한용운은 조선청년들에게 친일파로 오해 받아 습격을 받고 죽을고 비를 넘기며 시베리아까지 가지만 세계기행은 실패하게 됩니다.

용환지략: 청나라의 서계여가 지은 세계지리책이며 세계각국의 지리와 문화 역사및 사회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되어있음.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용운龍雲' (호는 만해萬海 )이라는 법명을 받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으며 백담사에 머물면서 불교 유신론의 기본틀을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1908년 시베리아 기행에서 실패했던 한용운은 일본으로 갑니다. 세계문명과 문물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배워 조선을 개혁하고 불교계의 변화발전을 위한 것이었죠.

1910년 8월 22일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은 '조동종 맹약'체결로 불교계까지 큰 혼란을 줍니다. 이에 분노한 한용운은 다음 해 뜻이 있는 스님들과 함께 조선불교를 지켜내기 위한 방편으로 임제종이라는 종파를 만들어 조선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에 있음을 선언하고 일본의 종과 맞서 싸웠습니다.

조동종 맹약: 1910년 10월 6일 조선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 승려 사이에서 체결된 굴욕적인 한일불교협약.

1911년 일제강점기 만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하던 때 한용운도 정세를 살피기 위해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갔다가 일본인 첩자로 오인받아 총에 맞고 또한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육체적 고통 또한 마음에서 온다는 한용운의 의지로 마취 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후유증으로 고개가 삐딱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 후 백담사로 돌아와 수행하면서 1913년에 간행된 불교계의 개혁에 큰 영향을 준 한국 근대 불서를 대표하는 <조선불교유신론> 1914년 <불교대전>등을 발행하고 불도의 진리를 깨달으며 1917년 오도송을 남기기도 합니다.

1918년 불교계를 대표하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합니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은 민족대표들과 뜻을 같이했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조선의 국민을 깨우고 전 세계를 향해 조선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싸우겠다는 결의를 담은 독립선언서에 자신의 생각 '공약 3장'을 추가로 담아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대표들을 그 자리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조선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데 그게 무슨 죄라고 수갑을 채운단말이냐,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으니 우리 발로 걸어가겠다. 비켜라!"라며 당당히 맞섰습니다. 일본의 혹독한 고문과 만행에도 한용운은 "모든 책임은 내가진다. 다른 사람들은괴롭히지 마라!"며 외쳤고 일본경찰이 한용운이 죽을죄를 지었다며 다그치자 "죽을죄라니! 조선사람이 빼앗긴 나라를 위해 나서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해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고 책임이다.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민족 앞에 죽을죄를 지는 것이다!"라며 소리쳤습니다. 그 후 감옥생활을 시작한 한용운은 1. 변호사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넣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이라는 '옥중투쟁 3대 원칙'을 정해놓고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1921년 12월 21일 한용운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형무소에서 나옵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우리 것으로 살자'즉 일본등 타국물건 대신 조선땅에서 나는 것을 조선인이 소비하자는 운동.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일본이 공포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 경성제국대학 설립에 대응하여 민족교육과 민족간부양성을 목적으로 조선인의 노력과 재력만으로 민립대학을 설렵하려고 만든 단체.

1924년 불교청년회장에 취임하고 장편소설 <죽음>을 탈고합니다. 

1926년 한국 근대 시의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 탈고합니다. 

1927년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연합하여 결상한 최대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합니다.

신간회와 신민회의 차이

신간회: 3.1 운동 이후 좌익과 우익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공개적인 단체.

신민회: 3.1 운동 이전에 있던  비밀결사 단체.

지회: 본회의 관리 아래 있으면서 일정한 지역 안의 일을 맡아보는 조직.

1929년 광주 전남지역의 학생들이 일본에 폭압에 항거한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개최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가게 됩니다.

1933년 서울 돈암동에 있는 진성당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던 유숙원을 만나 결혼한 후 이듬해 딸 한영숙이 태어났지만 일본이 만든 호적법에 반하여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내기 싫어 한용운이 직접 한문과 한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주토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동지들이 검거되고 한용운도 고초를 겪었습니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현재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어 있습니다.